2001. 3. 18. EBS 「미래토크 2000」, EBS


인문학은 고사(枯死)하는가?


【 미래토크2000 】75편-인문학은 고사(枯死)하는가? 논점들

2001년, 2/28 녹화, 3/18 방송


미래토크 2000 <75회> “인문학은 고사(枯死)하는가?” 논점들입니다.

각 질문에 대해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아래 논점들에 대한 답변을 바탕으로 토론 진행 대본을 구성하고자 합니다.

바쁘시겠지만 월요일까지 e-메일로 간략한 답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논점이외에도 보충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래토크 2000 은은희 작가



1. 인문학은 우리 삶에 있어 어떤 의미였고,  21세기에 인문학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답변:


- 전통 사회에서의 인문학: ‘學’(배움)이라고 칭해졌던 것. 전인적 인격체였던 성현의 뜻과 행동,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개인과 사회의 원리를 배워 바람직한 삶의 방법을 알고 실천하는 것.

- 21세기의 인문학: 인간이 행하는 지식 탐구의 귀결점은 인간 자신. 인간과 사회의 궁극적 가치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21세기의 인문학은 전통적인 인문학과 다를 바 없다.

- 그러나 그 학문하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만 머무는 독존적인 학문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타분야의 지식 활동에 봉사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2. 인문학이 위기라는 여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위기라면 무엇이 위기라고 볼 수 있습니까?


 답변:


 2-1.  인문학 자체의 위기입니까, 인문학과와 대학교수,,학생들의 위기인 겁니까?


- 대학의 인문계 학생이 줄어드는 것, 인문계 학과의 존폐 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대학에 소속된 인문학자의 위기’일 뿐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인 것은 아니다.

- 디지털 문화의 확산과 함께 인문학의 수요는 오히려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그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정말 위태로운 ‘인문학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2-2.  위기상황은 어느 정도입니까?


3. 현재의 위기는 인문학이 새롭게 도약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답변:


- 가능하다. 그러나 그 ‘위기 의식’이 ‘박탈감’이나 ‘자괴감’에 머물거나, 나의 현재에  더욱 집착하는(빼앗길까봐) 고집으로 치닫는다면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 말기의 지식인들이 ‘위기 의식’이 부족해서 나라를 잃는 파멸에 이르렀던 것은 아니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함께 꽁꽁 묶어 두는 바람에 변화를 향한 실천적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4. 한국적 현상입니까, 아니면 세계적인 인문학 위기의 시대입니까?


답변:


- 패러다임의 변화가 대학의 인문학을 위축시키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의 인문학자들이 갖는 ‘위기의식’은 다분히 한국적인 것에 원인이 있다.

- 한국 사회는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문민 지배 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인문학은 곧 지배 계층의 지식.  그 전통 속에 있는 오늘날 한국 인문학자들의 의식은 독존적 지위에 대한 열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학의 인문학이 위축되는 것에 대한 상대적 상실감이 더욱 큰 것이다.


5. 무엇이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보십니까?  (= 한국 인문학의 가장 큰 병폐는?)

   - 사회구조변화 탓인가, 인문학자의 문제인가, 교육정책의 문제인가, 대학행정의

     문제인가? 등


- 먼저 ‘인문학자의 위기’(독존적 지위의 상실)와 ‘인문학의 위기’를 구분하고 싶다.

- 전자의 원인은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자들의 잘못은 없다. (나는 그대로 있는데,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인문학에 전념해 온 사람에게 급속한 사회 변화에 따라 지식과 가치관을 바꿀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인문학의 위기’는 현실적으로 말해 ‘시장의 위축’이다. 대학내에서 인문학 영역이  위축되게 된 근인은 교육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인문학자들이 될 것이다.


6. 인문학 위기극복, 어떤 변화가 필요하고, 무엇이 실천되어야 하겠습니까?


답변:


- 인문학적 지식이 그 자체로 독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학문적 지식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인문학은 돈 안드는 학문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제대로 된 원천 지식을 생산하는 데에 재원이 필요치 않을 수 없다. 원천 지식이 2차적 지식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사전, 지식 데이터베이스의 편찬)에는 더욱 큰 재원이 소요된다. 

- 그 재원은 어디에서 제공되어야 하나? 정부? 지난 해 우리 정부가 국책 연구개발비로 쏟아 부은 돈은 3조7천5백억 원(총 예산의 3.4%).  인문사회과학 분야 투자금액은 과학기술분야의 1/100에 미달. 그러나 단기적 실효성을 위주로 하는 공공 재정 운영의 속성을 놓고 볼 때 이 것 역시 잘못된 비율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정부 지원금은 인문학 연구자의 몫이 아니다.

- 인문학은 순전히 교육 시장에 의존하여 근근히 살아 왔다. 그런데 학생들이 더 이상 인문학과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 대학의 인문계 학과는 10명의 전공자를 확보하려고 버둥거리기보다는 과감히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1000명의 부전공 학생을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인문학자가 자기 수준의 전문 연구자를 배출하는 것은 10년에 한 명이면 족하다. (그래도 30년이면 3명, 2 사람의 남녀가 6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과 같은 비율이다.)

- 부전공 학생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인문학적 지식이 그 자체로 독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학문적 지식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인문학적 지식이 대학 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분야에 확산되도록 하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6-1. 학문의 서구종속성을 벗어나기 위한 과제는 무엇이겠습니까?


답변:


- 정말로 우리 인문학이 ‘서구종속적’인가? 서구의 최신 학문과 학사 운영기술을 신속하게 모방하면서, 그들의 닮은꼴이 되어 가고 있는가?

- 우리의 현대 학문은 서구의 모방으로 시작. 일제시대나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커리큘럼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신설대학은 기성대학의 교과를 그대로 복제.

- ‘서구종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실은 변화하지 않는 ‘대학과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6-2. 통합학문으로의 방향선회는 가능할까요? 인문학적 지평을 확대하는...

   - 즉 ‘문화연구’와 같이 각 인문학 분야를 망라하는 새로운 학문으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인문학이 학제적, 다학문적 학문으로서의 선회하는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문학이 원래 그러한 학문이었으니까. 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은 앞으로 그러한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연구자 자신이 통합학문 연구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연구자 개개인의 부담이 크다.(잔뜩 좁혀 놓았어도 공부할 것이 많은데, 옆에 것까지 돌아보아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인문학은 특히 수천년 전의 과거로까지 소급되는 지식의 온축이 필요하고 해석의 엄밀성을 수반해야 한다.  적어도 대학내 인문학 연구자의 90%는 앞으로도 여전히 좁은 분야의 전문가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9 명의 전문 학자 곁에 1 명의 Generalist가 있어서 학제적 소통자의 역할을 한다면 ‘의사 소통에 의한 통합학문‘은 충분히 일어설 수가 있다. 그 1 명의 Generalist를 용인하고 교육 시스템을 개방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 연구자의 비율은 9:1일지라도 그들에게서 배워 사회에서 활동할 학생들의 관심 영역은 1:9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6-3. 디지털 문화, 새로운 인문학으로의 방향전환 토양이 될 수 있을까요?


답변:


- 디지털 컨텐츠에 담을 ‘사상’과 ‘정서’는 누구에 의해 공급되겠는가?

- 거대 조직의 부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모두가 리더인 작고 창의적인 조직의 구성원이 되고자 한다면?

- 사이버 세계에서 사회 문제와 문화 현상에 관한 담론의 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현실은 디지털 문화 속에서 인문학적 지식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을 엿보게 한다. 인터넷은 일차적으로 맹목적이라고 할 만큼 무차별적인 지식(정보)의 유통에 기여했지만, 그 옥석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리고자 하는 공개적인 담론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격렬한 논쟁의 주제들이 궁극적으로 돌아가는 곳은 바로 인문학적 지식이 제공하는 인간과 사회의 가치 문제이다.


6-4. 대학을 벗어난 인문학 연구들,  인문학 활성화에 기여할 희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답변:


- 암호화된 지식을 풀어내어 현실 사회의 수요자에게 제공하는 대학 밖의 인문학은 분명히 ‘희망’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 활동의 기반이 되는 원천 지식은 대학 내의 전문 연구자들에게서 생산될 수밖에 없다.  고정적인 급여와 도서관의 자료, 교수들에게만 열려 있는 연구 프로젝트. 이러한 여건을 대학 밖에 조성하는 것은 불가능. 따라서 대학 밖의 인문학은 현실적 수요를 좇아 움직일 수밖에 없다.(이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원천 지식을 생산하는 것보다는 그것들을 종합하고 새롭게 해석하여 보다 대중적인 지식으로 가공하는 데 치중할 것이다. 원천 지식의 생산은 대학 내 연구자들의 몫이다. 대학의 연구자들이 그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그 피해는 대학 밖의 연구자들이 받게 된다. (원천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대중적 지식의 생산이 더욱 힘들어질 테니까)


6-5. 인문학의 학문적 연구와 실용적 측면을 동시에 충족시킬 방안은 없습니까?


답변:


-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 종사자들 내에서의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원천 지식의 생산자와 2차적 지식으로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

- 문제는 첫째, 우리의 대학 사회에서는 아무도 후자의 역할을 하려 하지 않는 것. 둘째, 대학 밖에서 후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지만 전자와 후자 사이에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 셋째, 전자가 담당하는 원천 연구 그 자체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 인문학자는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낼 필요가 없다.  세상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려 하기보다는 실용적, 대중적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작가, 언론인 등)에게 지식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겸허하게 수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전문 연구가 진정으로 학문적인 엄밀성을 갖고 제대로 행해졌다면 그것은 다른 누구에 의해 실용적 지식의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


-기타-

7. “인문학은 고사(枯死)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 한마디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토론자 소개 시 주제에 대한 전망(혹은 주장)을 응축시켜 나타낼 문장이 필요합니다.

   한 줄 반 정도의 길이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 사이버 세계에 열린 새로운 담론 장. 그곳에서의 격렬한 논쟁이 궁극적으로 돌아가는 곳은 인간과 사회의 가치 문제이다.